"아프리카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거대한 대륙이라는 점이 가슴을 떨리게 한다" 고 했다.
10년 전 참혹한 현실 보고 교도소로 들어가 생활
농장 만들고 남은 식량 교도소 밖 아이들에 무상급식
국내 NGO 등에 ‘사랑의 음식’ 지원 호소
국제 NGO(비정부기구)인 ‘사랑의 곡식(Crops of Love Ministries)’ 재단의 아프리카 본부장 김용진(56) 박사는 “아프 리카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살고 있다”고 자신을 표현했다. 김 박사는 동아프리카의 내륙 국가 말라위의 인구 9000명의 도시 마칸디에 산다. 그의 숙소는 마칸디교도소 교도관 내 관사 다. 재소자들이 있는 교도소에서 사는 그가 어떻게 자신이 안 전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7월 14일 서울을 잠시 찾은 김 박사를 만났다.김 박사는 말라위 내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은 대부분 생계형 범죄자라고 말했다. 돈을 빌렸다가 못 갚아서 몸으로 때우려고 오는 사람,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훔치다 걸린 가장 등 사연이 많다고 했다. 김 박사는 “물론 그 친구들 모두 자신의 동네를 들었다놨다 한 인물들이지만 다들 순박한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재소자들이 자신의 거처를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개방해 놓고 지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셰퍼드를 여섯 마리씩 기르면서도 불안해하는데 저는 다 열어놓고 지내도 훔쳐갈 사람이 없어요”라며 웃었다. 서로간에 연대가 생긴 만큼 오히려 안전하다는 이야기다.
범죄학 전공, 재소자에 관심
김 박사는 2006년부터 말라위에 살면서 마칸디교도소 재소자를 위한 ‘사랑의 곡식 재단’을 만들었다. 그가 재소자들을 돌보는 건 말라위의 열악한 상황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2002년 처음 방문해서 본 마칸디교도소의 참혹한 상황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알고 왔지만 김 박사가 ‘프리즌 팔로십 인터내셔널(국제교정선교기관)’ 활동을 통해 직접 본 상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불과 23~26㎡(7~8평)의 공간에 50여명의 죄수가 수용돼 있었다. 하루에 죽 한 끼만 먹는 재소자들은 서로의 머리와 다리를 베고 하루 종일 겹쳐 누워 있었다.
원조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던 교도소를 보며 그는 혼자라도 도움을 주겠다는 일념으로 말라위를 찾았다. 그가 이렇게 재소자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범죄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미국 텍사스주립대학에서 범죄학 학위를 받은 그는 한동대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한 바 있다.
처음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꺼리던 마칸디 재소자들에게 김 박사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테이프를 만드는 일을 가르쳤다. 재소자들에게 성경·소설·동화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녹음시킨 후 그들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시각장애인에게 전달했다. 나눔의 시작이었다. 이후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만들기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다가 어느새 재소자들이 수확한 농작물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지금에까지 이르게 됐다.
교도소 밖 주민들에게 눈 돌려
김 박사는 최근 부뚜막을 만들어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한국형 부뚜막이다. “진료소를 운영하는데 자꾸 비싼 안약을 찾아요.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고요. 왜 그런가 싶어 알아봤더니 안질 때문이었어요. 주부들 안질의 주된 원인은 연기입니다.
말라위인은 부엌 한쪽에 돌멩이 세 개를 두고 불을 지펴 요리를 한다. 연료가 타면서 나는 연기가 따로 빠져나갈 곳이 없다. 주부들은 취사 때마다 가득 찬 연기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밥 짓느라 연기에 늘 노출돼 있는 사람들이 더러운 손으로 눈을 비벼대니까 안질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상황을 살피던 김 박사는 ‘부뚜막을 만들고 뒤로 연기를 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시멘트로 부뚜막을 만들었다. 처음 부뚜막을 놓아준 집은 국내 자선단체 ‘굿피플’과 자매결연을 한 아홉살인 호나보고웨조와 미쇼지웰레케시의 집이었다. 시험 설치 후 주민들을 모아 보게 하였더니 반응이 뜨거웠다.
지난 5월부터 두 달에 걸쳐 모두 60집에 부뚜막을 만들어줬다. 문제는 비용. 부뚜막 한 개를 만드는 데는 2만5000원 정도의 시멘트 한 포가 필요했다.
한국인을 다시 보다
김 박사의 활동으로 말라위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좋다. 초창기 김용진 박사가 돌아다니면 현지 주민들은 그를 “차이나, 차이나”라고 불렀다. 이제는 ‘닥터 김’이라 불리는 한국인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백인들이 모두 떠난 아프리카에서 이만큼 활동을 하는 외국인들이 없어요. 말라위의 이민국장도 저에게 ‘중국, 인도는 모두 비즈니스 관계로만 오는데, 한국처럼 아프리카를 유익하게 만들려고 도와주는 이상한 사람들은 없다’고 하더군요.”
한국인들의 마음이 말라위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시작했지만 이들을 돕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김 박사의 말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사람들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했다.
“불쌍한 아이들을 안고 사진을 찍고 하는 것들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아내는 방법이죠. 하지만 이런 기부는 자신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안 하게 되지요.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무조건 퍼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사랑의 곡식 재단이 지난 5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사랑의 음식(Meals of Love)’ 급식 프로그램은 그렇게 시작됐다. 재소자들이 재배해 수확한 옥수수로 가난한 아이들까지 먹이는 것으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이웃을 돕게 만드는 움직임의 시작이다.
“처음에 재소자들을 만났을 때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 사람들에게 남을 도우라고 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었어요. 때문에 재소자들 스스로 최소 하루 두 끼 이상 먹을 수 있도록 직접 땅을 가꿔보자는 생각으로 밭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재소자들은 사람답게 살자는 의지를 불사르며 마칸디교도소 내 15만㎡(4만5000평)의 땅을 가꿔 옥수수, 콩 등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수확물이 점차 늘어났고 수확물 중 절반을 고아원, 병원 등에 기부할 정도가 됐다. 수확한 곡식을 외부 시설에 전달하러 갈 때 그는 재소자들을 일부러 동행시킨다. 그는 “재소자가 남에게 기여한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하고, 남들에게는 재소자도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베푸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말라위 시골길을 다니다 보면 학교에 가야 할 어린 아이들이 나무 그늘 밑에 그냥 앉아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는 것이 알고 보니 배가 고프기 때문이더군요. 허기진 배로 먼 길을 걸어서 학교에 간들, 대여섯 시간 동안 비스켓 하나 얻어먹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걸어서 집에 와야 합니다.”
오전 11시쯤 옥수수와 콩을 섞은 죽을 주는 데 불과하지만 이 한 끼 무상급식 후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끼도 먹기 힘든 나라에서 아이들에게 식사를 주는 학교는 천국과 다름없다. 마칸디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죽은 ‘리쿠니팔라’다. 리쿠니는 옥수수와 콩을 섞은 죽을 만들기 시작한 마을 이름이고, 팔라는 현지어로 죽을 뜻한다. 사랑의 곡식 재단은 이 죽에 비타민과 철분 등 아이들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첨가했다. 한 달 동안 아이 한 명에게 리쿠니팔라를 먹이는 데 드는 비용은 우리 돈으로 2000원. 교회나 개인의 기부금을 받아 지금까지 550명의 주린 배를 채워줬다. 올 하반기부터는 마칸디초등학교에 한정돼 있던 급식을 세 곳으로 늘려 2000명의 아동들에게 급식을 확대할 예정이다.
모잠비크서도 “도와달라”
그는 앞으로 다른 아프리카 나라 교도소에 대해서도 마칸디교도소와 같은 사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3년 전부터 말라위 주재 모잠비크 대사가 자기네 나라에 와달라고 재촉했어요. 이곳이 자체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더욱 확산시킬 예정입니다.”
그가 10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에 다녀간 건 국내 NGO 단체들과 마칸디 마을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낳은 부뚜막 지원, 사랑의 음식 캠페인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언론에 보도되는 걸 꺼렸어요. 그런데 무상급식을 시작한 만큼 이제는 무조건적으로 도움을 청해야 해요. 배고픈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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